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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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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쿠로는, 우주를 올려다 볼 때 쿠로의 신을 생각하는 건가."
"글쎄... 굳이 그렇지는 않은데. 뭐,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
과학자들 사이에도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아직까지도 믿겨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과학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미신이고, 그런 것이 가득한 세계에서 과학은 태어났으며, 구원자로서 홀로 빛났다. 켄마에게 과학이란 그런 존재였다.
1. 켄마는 무신론자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아니,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청소년기 중 어느 날 켄마는 스러짐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덜덜 떨며 생각한 것들을 기록했다. 켄마는 불 끈 이불 속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곳은 새까만 우주 공간이었으며,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도저히 어두운 곳에 있을 수가 없어 밤에는 집안의 모든 불을 죄 켜놓고 게임에 몰두했으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비로소 수면을 취했다. 죽음은 밤과 함께 찾아왔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태어났지? 어머니의 어머니로 몇 억 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나. 우주는 얼마나 넓은가. 우주는 어디에서 태어났나.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가. 켄마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을 믿지 않았다. 켄마는 생명체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며,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닿지 못할 미래가 궁금하고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의학이 발달한 미래에는 분명 죽음의 대체제를 찾아낼 것이다. 따라서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켄마는 자신의 시대가 그렇지 않은 것을 저주했다. 노화되는 몸 안에서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저주했다. 14살, 죽어가는 자신을 저주했다. 사춘기였다. 켄마의 중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이었다.
2. 켄마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후로 그런 의문들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충격으로 비틀린 생체시계는 쉬이 궤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켄마는 새벽에 깨어있었고, 아침에 전혀 눈을 뜨지 못했다. 모자란 잠은 학교에서 전부 보충했다. 과하게 요약하자면 그것이 켄마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 그런 공백 속에서도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나마도 책에서 읽은 것이다. 세 글자로써 의문이 풀렸다. 켄마는 소리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 때의 쾌감,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켄마는 자신이 오직 DNA의 숙주라는 것을 이해했다. 결국 켄마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켄마는 깨달았던 것이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3. 켄마는 생명과학을 전공한다.
둥그런 행성이 있었다. 어느날 번개가 크게 쳤고, 그 충격으로 야릇한 모형의 분자가 생성되어 자기 복제를 시작했다. 그것이 단백질인지 RNA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시발점이다. 동시에 그것이 전부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러나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라는 성질이 시간을 거쳐 켄마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연 선택과 진화다. 그게 다다. 켄마는 둥그런 지구 위에서 어느날 꾸물꾸물 일어난 흙덩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얌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애벌레 같이 기다가 땅속으로 가라앉고, 또 다른 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흙덩이를 상상한다. 켄마는 물러서서 푸르게 희미한 지구를 응시한다. '아름다운 모양이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서 그는 원자로 이루어진 우주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4. 쿠로오는 성소수자다.
쿠로오는 천체물리학을 전공한다. 쿠로오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을 고등학생 때 깨달았고, 그는 말없이 품어 안았다. 쿠로오의 고등학생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는 완벽한 실패였다. 쿠로오는 모욕당했고, 그것을 털어냈다. 쿠로오는 채팅어플에서 켄마를 만났다.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이 크게 달갑지는 않았으나 며칠 간의 대화 끝에 주도해서 약속을 잡았다. 켄마는 1살 연하, 왜소한 체격의 내향적인 남자였다. 반면 쿠로오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왔고 훤칠한 키,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떤?" "아, 배구를 조금." "아." 쿠로오는 켄마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본연은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는 재미없기 위해 애쓰는 사람 같았다. 둘 사이에는 공유되는 주제가 거의 없었다. 같은 이과라고는 하나 쿠로오는 자연대였고 켄마는 공대 소속이었다. 켄마는 간략하게 대꾸만 할 뿐 별로 말하지 않았다. 둘은 채팅어플에서 만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캠퍼스 내에서 아는 선후배 사이로 지내기로 했다. 의례적인 작별인사나 다름없었다.
5. 쿠로오는 성당에 다닌다.
캠퍼스 내에서 쿠로오가 켄마와 마주친 것은 처음이자 우연이었다.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는 켄마를 붙잡았다. "코즈메 씨, 혹시 지금 바빠요?" "...아뇨." "그럼 미안하지만 나 좀 도와줄래요? 나중에 밥 한번 살게요." 쿠로오가 켄마를 데리고 향한 곳은 대학 내 도서관이었다.
"전산 시스템이 고장이래서요. 책을 찾아야하는데 검색 시스템을 쓸 수가 없어요. 이거 두 권만 좀 찾아주세요."
쿠로오가 책 제목과 저자가 적힌 메모를 건네며 말했다. 도서관은 거대했고 도서를 찾는 일은 20분 가량 걸렸다. 대강 책을 훑어보니 하나는 '생명 설계도, 게놈', 다른 하나는 종교 서적.
"책 읽는 거 좋아하시나봐요."
가져온 두꺼운 책들을 쿠로오에게 넘겨주자 쿠로오가 든 책은 다섯 권이 되었다.
"심심풀이로, 좋아해요. 장르 안가리고 아무거나 읽어요. 코즈메 씨는요?"
켄마는 느릿하게 자신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도서관에 자주 오느냐는 물음에 어딘지 몰라서 못왔다고 대답하자 쿠로오가 큭큭 웃었다. "코즈메 씨가 하도 무덤덤해서 잊고 있었는데, 새내기였죠, 참." 쿠로오는 가방에 책들을 집어넣었다. "그럼 앞으로 도서관에서 또 만날 수도 있겠네요." 켄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쿠로오는 그를 라멘집으로 데려갔다. 켄마는 여전히 별 말이 없었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는 쿠로오는 카페에서 만났을 때보다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그런 그를 살피며 켄마는 입을 열었다.
"아까, 생명과학 책..."
"아, 코즈메 씨 생물 쪽이었죠. 저도 생물 좋아해요. 고등학생 때 공부는 안했지만요... 책이나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왠지 쑥쓰럽네요."
"...쿠로오 씨는 신기한 사람이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쿠로오를 바라보며 켄마가 작게 웃었다.
6. 켄마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은 일주일에 두어번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거나 공부했다. 그런 후 밥을 사먹기도 했다. 서로 말을 놓기로 했고 쿠로오는 켄마를 이름으로 불렀다. 코즈메 켄마는 한마디로 공백 같은 사람이었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남겨둔 것이 별로 없는 사람 같았다. 쿠로오 테츠로는 켄마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접근했다. 그러나 점차, 그 빈 공간을 자신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백했다. 열리기를 꺼려하는 그 입이 자신과의 이야기로 채워지기를 기대하며 고백했다. 두 달만의 일이었다. 켄마는 덤덤하게 수용했다. 둘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자주 만났다. 켄마는 연인 관계 같은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은 듯 보였다. 하지만 쿠로오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켄마는 서툴다. 그리고 켄마는 쿠로오를 좋아한다. 그러니 쿠로오가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란히 걷는 켄마의 새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좋아해, 켄마." 쿠로오가 말했다.
7. 쿠로오는 기다린다.
"이쪽에도 생물과 관련된 학과가 있어. 우주생물학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만."
"최근에 그거에 대한 책을 읽었거든. 그쪽 분야의 선구자인 미국 교수라고 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책이었어. 거기에 새로운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 우주에 다른 생물이 있을 것이다. 만약 발견한다면, 혹은 발견되어진다면 우주생물학은 발전할 것이다. 이정도 느낌. 정말 김새지."
"그렇겠지 뭐."
쿠로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켄마 너는... 지구 밖에 생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 켄마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었다. 물론. 그럼 켄마,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을까? 글쎄.
8. 켄마는 신을 증오한다.
세포는 우주와 닮아있다. 여기, 하나의 우주가 꾸물거린다. 우리는 미지의 생명체를 찾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은 다른 생명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켄마... 켄마... 앓는 소리에 켄마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는 달래듯이 쿠로오의 벗은 가슴팍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훑는다. 쿠로오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비틀었다. 켄마의 두 팔을 애타게 붙잡으며 어루만진다. 옅은 램프등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땀방울에 은하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살에서 살으로, 그리고 이불자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켄마는 언젠가 물었던 것을 회상한다. '천주교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지 않나?' '뭐 그렇지. 집안 내력이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그때 켄마는 쿠로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러면 쿠로는 미사를 드릴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딱히.' '쿠로는 정말로 신이 있다고 믿어?' 켄마는 추궁하듯이 캐물었었다. 그리고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무례한 말이다. 쿠로오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쿠로오는 다만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푸스스 웃을 뿐이었다. 켄마가 재촉하자 겨우 입을 열었다. '글쎄...'
켄마는 쿠로오를 따라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쿠로오는 말렸지만 켄마가 고집을 부렸다. 새벽 미사에 가기 위해 켄마는 밤을 지새웠다. 쿠로오는 예배당 뒤에 위치한 대야에서 손가락에 물을 묻혀 가슴 위로 십자가를 그렸다. 켄마는 따라하지 않았다. 중간 열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남자가 기도를 올리고 면사포를 쓴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압도당할 정도로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이었다. 옆에 앉은 쿠로오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켄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르간 파이프에서 나는 커다란 진동이 머리를 울렸다. 화려하고 기괴한 스테인글라스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을 켄마는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을 사먹고 쿠로오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켄마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 이후로 켄마는 성당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9. 쿠로오는 밤을 걷는다.
쿠로오는 밤에 산책나가는 것을 즐겼다. 거처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강변 산책로가 있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서는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슬쩍 빠져나간다. 그곳은 무성하게 자란 수풀 사이의 마른 땅, 혹은 강과 바로 맞닿은 넙적한 바윗돌 위나 단순히 가로등이 꺼진 길 한가운데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냐고 물으면 그는 별을 본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별이 아니라, 그냥 멍때리고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거였어. 그런데 이제는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어.' 집 근처는 너무 밝기 때문에 달빛마저 희미하다며 쿠로오가 투덜댔다. 쿠로오는 자신의 '은신처' 중 하나로 켄마를 안내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몇몇 별자리들을 켄마에게 가르쳤다. 켄마는 하루도 안되어 그것들을 잊어버렸다. 쿠로오는 켄마 앞에서 다소 수다스러운 경향이 있었으나 그럴 때, 하늘을 쳐다볼 때 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신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켄마."
그랬기에 쿠로오가 입을 열었을 때 켄마는 조금 놀랐다. 둘은 한적한 곳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켄마는 고개를 돌려 쿠로오를 쳐다봤다. 쿠로오는 여전히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저 우주 너머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그 생명은 지구를, 그러니까 너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 생명은 아주 오래 살았어. 아마도 우리의 지구가 생겨나기 전부터 대를 거듭했어. 우리가 보기에는 그 생명체가 너무 대단할거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마법들을 부리겠지. 그 생명체는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할만할 정도로 위대해... 하지만 그 생명체가 사는 행성에서는 또다시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있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상상을 해."
"...소설 같아."
"그리고 그렇게 '지성과 신의 관계'가 거듭되다 보면, 그 끝에는 진짜배기 신이 있을까?"
"...무신론자는 모든 것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믿어."
"그렇다면 켄마, 나는 무신론자일까?"
10.
"어렸을 때는 신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신이 나를 굽어 살피고, 내 기도를 듣는다고 믿었어."
"어린아이는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
"크다가 보니까... 잘 모르겠더라고. 신이 보살핀다고 보기에 세상은 너무 엉망이었어.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신은 누군가의 사업을 도와주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었다지만, 나라를 정의롭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어."
"...쿠로."
"내가 게이가 되었을 때, 신은 나를 거부했어."
켄마가 눈치를 살피며 대꾸 없이 있자 쿠로오는 뒤늦게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쿠로오는 급히 덧붙였다.
"미안, 켄마. 너를 곤란하게 해버렸네. 나는 그냥... 잘 모르겠어."
"...신이 그랬듯이, 쿠로도 신을 버릴 수는 없는거야?"
"...잘 모르겠어, 켄마. 나는 성당에 가는걸 싫어하지는 않아. 나에게 잔잔함을 주거든. 그곳에는 많은 기억들이 담겨져 있어."
"나는 잘 모르지만, 추억 때문에 종교를 가지지는 않아, 보통은."
"글쎄, 어떨까..."
쿠로오는 켄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잘 시간이야." 온기를 느끼며 켄마는 쿠로오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쿠로오는 팔을 뻗어 램프의 등을 껐다.
11. 그는 꿈을 꾼다.
12. 그날, 켄마는 좋아한다고 말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어느 새 사귄지 1년 조금 넘었다. 켄마는 말이 없었다. 쿠로오는 조심스레 켄마를 살폈다. 켄마는 무표정이었다. 다만 라멘 먹기를 멈췄을 뿐이었다.
"미안해, 켄마."
"미안할 거 없어."
둘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헤어졌다. 쿠로오가 켄마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리문 너머로 켄마가 사라질 때까지 쿠로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후로 쿠로오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켄마도 그렇게 했다. 아마도 휴학을 했을 것이었다. 더이상 도서관에서 쿠로오를 만날 수 없었고, 켄마는 쿠로오를 찾지 않았다. 쿠로오에게서 다시 메세지가 온 건 3개월 뒤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98일.' 켄마는 생각한다.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자.' 메세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켄마는 오랫동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쿠로오는 일요일 오전에 켄마를 만나준 적이 없었다. 조금 후에 메세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보고 싶어.' 소리 없는 감정에 켄마는 조금 울었고 오랫동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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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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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쿠로는, 우주를 올려다 볼 때 쿠로의 신을 생각하는 건가."
"글쎄... 굳이 그렇지는 않은데. 뭐, 어떻게 보면 그렇다고도 할 수 있겠네."
과학자들 사이에도 미신을 믿는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놀랐다. 사실 아직까지도 믿겨지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과학의 정반대편에 있는 것이 미신이고, 그런 것이 가득한 세계에서 과학은 태어났으며, 구원자로서 홀로 빛났다. 켄마에게 과학이란 그런 존재였다.
1. 켄마는 무신론자다.
태초에 빛이 있었다? 아니, 태초에 빅뱅이 있었다. 청소년기 중 어느 날 켄마는 스러짐에 대해 생각했다. 죽음은 어둠과 함께 찾아왔다. 눈물을 줄줄 흘리고 덜덜 떨며 생각한 것들을 기록했다. 켄마는 불 끈 이불 속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곳은 새까만 우주 공간이었으며, 결론적으로 아무것도 없었다. 도저히 어두운 곳에 있을 수가 없어 밤에는 집안의 모든 불을 죄 켜놓고 게임에 몰두했으며, 창으로 들어오는 햇빛 속에서 비로소 수면을 취했다. 죽음은 밤과 함께 찾아왔다. 사람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나는 왜 태어났지? 어머니의 어머니로 몇 억 년 거슬러 올라가면 그 끝에는 무엇이 있나. 우주는 얼마나 넓은가. 우주는 어디에서 태어났나. ...죽음 후에 무엇이 있는가. 켄마는 미신을 믿지 않았다. 육체와 분리되는 영혼을 믿지 않았다. 켄마는 생명체가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며, 그게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두려웠다. 무로 돌아가는 것이 두려웠다. 자신이 닿지 못할 미래가 궁금하고 두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의학이 발달한 미래에는 분명 죽음의 대체제를 찾아낼 것이다. 따라서 돈만 있다면 얼마든지 영생을 살 수 있을 것이었다. 죽고 싶지 않아. 켄마는 자신의 시대가 그렇지 않은 것을 저주했다. 노화되는 몸 안에서 죽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저주했다. 14살, 죽어가는 자신을 저주했다. 사춘기였다. 켄마의 중학교 마지막 여름 방학이었다.
2. 켄마는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후로 그런 의문들은 점차 사그라들었다. 그러나 충격으로 비틀린 생체시계는 쉬이 궤도로 돌아오지 않았다. 켄마는 새벽에 깨어있었고, 아침에 전혀 눈을 뜨지 못했다. 모자란 잠은 학교에서 전부 보충했다. 과하게 요약하자면 그것이 켄마의 고등학생 시절이었다. 그런 시절, 그런 공백 속에서도 아직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그나마도 책에서 읽은 것이다. 세 글자로써 의문이 풀렸다. 켄마는 소리 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그 때의 쾌감, 그 떨림을 아직도 기억한다. 켄마는 자신이 오직 DNA의 숙주라는 것을 이해했다. 결국 켄마는 아무 존재도 아니었다. 켄마는 깨달았던 것이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다.
3. 켄마는 생명과학을 전공한다.
둥그런 행성이 있었다. 어느날 번개가 크게 쳤고, 그 충격으로 야릇한 모형의 분자가 생성되어 자기 복제를 시작했다. 그것이 단백질인지 RNA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이 시발점이다. 동시에 그것이 전부다. 어쩌면 필연적으로, 그러나 우연히 생겨난 '자기 복제'라는 성질이 시간을 거쳐 켄마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은 자연 선택과 진화다. 그게 다다. 켄마는 둥그런 지구 위에서 어느날 꾸물꾸물 일어난 흙덩이를 생각한다. 그리고 다시 얌전히 흙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애벌레 같이 기다가 땅속으로 가라앉고, 또 다른 곳에서 꿈틀거리기 시작하는 흙덩이를 상상한다. 켄마는 물러서서 푸르게 희미한 지구를 응시한다. '아름다운 모양이다.'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서서 그는 원자로 이루어진 우주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것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다.'
4. 쿠로오는 성소수자다.
쿠로오는 천체물리학을 전공한다. 쿠로오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것을 고등학생 때 깨달았고, 그는 말없이 품어 안았다. 쿠로오의 고등학생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 연애는 완벽한 실패였다. 쿠로오는 모욕당했고, 그것을 털어냈다. 쿠로오는 채팅어플에서 켄마를 만났다. 같은 대학에 재학 중이라는 사실이 크게 달갑지는 않았으나 며칠 간의 대화 끝에 주도해서 약속을 잡았다. 켄마는 1살 연하, 왜소한 체격의 내향적인 남자였다. 반면 쿠로오는 지속적으로 운동을 해왔고 훤칠한 키,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어떤?" "아, 배구를 조금." "아." 쿠로오는 켄마가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본연은 어떤지 몰라도, 겉으로 드러난 그는 재미없기 위해 애쓰는 사람 같았다. 둘 사이에는 공유되는 주제가 거의 없었다. 같은 이과라고는 하나 쿠로오는 자연대였고 켄마는 공대 소속이었다. 켄마는 간략하게 대꾸만 할 뿐 별로 말하지 않았다. 둘은 채팅어플에서 만나기를 그만두기로 했다. 대신 캠퍼스 내에서 아는 선후배 사이로 지내기로 했다. 의례적인 작별인사나 다름없었다.
5. 쿠로오는 성당에 다닌다.
캠퍼스 내에서 쿠로오가 켄마와 마주친 것은 처음이자 우연이었다. 둘은 가볍게 인사를 나눴다.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는 켄마를 붙잡았다. "코즈메 씨, 혹시 지금 바빠요?" "...아뇨." "그럼 미안하지만 나 좀 도와줄래요? 나중에 밥 한번 살게요." 쿠로오가 켄마를 데리고 향한 곳은 대학 내 도서관이었다.
"전산 시스템이 고장이래서요. 책을 찾아야하는데 검색 시스템을 쓸 수가 없어요. 이거 두 권만 좀 찾아주세요."
쿠로오가 책 제목과 저자가 적힌 메모를 건네며 말했다. 도서관은 거대했고 도서를 찾는 일은 20분 가량 걸렸다. 대강 책을 훑어보니 하나는 '생명 설계도, 게놈', 다른 하나는 종교 서적.
"책 읽는 거 좋아하시나봐요."
가져온 두꺼운 책들을 쿠로오에게 넘겨주자 쿠로오가 든 책은 다섯 권이 되었다.
"심심풀이로, 좋아해요. 장르 안가리고 아무거나 읽어요. 코즈메 씨는요?"
켄마는 느릿하게 자신도 그렇다고 답했다. 그럼 도서관에 자주 오느냐는 물음에 어딘지 몰라서 못왔다고 대답하자 쿠로오가 큭큭 웃었다. "코즈메 씨가 하도 무덤덤해서 잊고 있었는데, 새내기였죠, 참." 쿠로오는 가방에 책들을 집어넣었다. "그럼 앞으로 도서관에서 또 만날 수도 있겠네요." 켄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쿠로오는 그를 라멘집으로 데려갔다. 켄마는 여전히 별 말이 없었지만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꺼내는 쿠로오는 카페에서 만났을 때보다 어쩐지 즐거워보였다. 그런 그를 살피며 켄마는 입을 열었다.
"아까, 생명과학 책..."
"아, 코즈메 씨 생물 쪽이었죠. 저도 생물 좋아해요. 고등학생 때 공부는 안했지만요... 책이나 한번 읽어봐야겠다고 내내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왠지 쑥쓰럽네요."
"...쿠로오 씨는 신기한 사람이네요."
고개를 갸우뚱하는 쿠로오를 바라보며 켄마가 작게 웃었다.
6. 켄마는 좋아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둘은 일주일에 두어번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읽거나 공부했다. 그런 후 밥을 사먹기도 했다. 서로 말을 놓기로 했고 쿠로오는 켄마를 이름으로 불렀다. 코즈메 켄마는 한마디로 공백 같은 사람이었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남겨둔 것이 별로 없는 사람 같았다. 쿠로오 테츠로는 켄마가 다루기 쉬운 사람이라고 생각해 접근했다. 그러나 점차, 그 빈 공간을 자신으로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고백했다. 열리기를 꺼려하는 그 입이 자신과의 이야기로 채워지기를 기대하며 고백했다. 두 달만의 일이었다. 켄마는 덤덤하게 수용했다. 둘 사이에 큰 변화는 없었다. 다만 조금 더 자주 만났다. 켄마는 연인 관계 같은 것은 어떻게 되어도 좋은 듯 보였다. 하지만 쿠로오는 실제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켄마는 서툴다. 그리고 켄마는 쿠로오를 좋아한다. 그러니 쿠로오가 이끄는 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다. 나란히 걷는 켄마의 새까만 정수리를 바라보다 싱긋 웃었다. "좋아해, 켄마." 쿠로오가 말했다.
7. 쿠로오는 기다린다.
"이쪽에도 생물과 관련된 학과가 있어. 우주생물학이라고 들어봤어?"
"...들어만."
"최근에 그거에 대한 책을 읽었거든. 그쪽 분야의 선구자인 미국 교수라고 했어. 결론부터 말하자면, 정말 아무것도 없는 책이었어. 거기에 새로운 내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어. 우주에 다른 생물이 있을 것이다. 만약 발견한다면, 혹은 발견되어진다면 우주생물학은 발전할 것이다. 이정도 느낌. 정말 김새지."
"그렇겠지 뭐."
쿠로오는 잠시 고민하다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켄마 너는... 지구 밖에 생물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때 켄마는 별로 고민하지 않고 대답했었다. 물론. 그럼 켄마, 그들이 우리를 찾아냈을까? 글쎄.
8. 켄마는 신을 증오한다.
세포는 우주와 닮아있다. 여기, 하나의 우주가 꾸물거린다. 우리는 미지의 생명체를 찾는다. '그도 그럴 것이 생명은 다른 생명을 찾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켄마... 켄마... 앓는 소리에 켄마는 퍼뜩 정신을 차린다. 그는 달래듯이 쿠로오의 벗은 가슴팍을 양손으로 쓰다듬으며 훑는다. 쿠로오가 신음과 함께 고개를 비틀었다. 켄마의 두 팔을 애타게 붙잡으며 어루만진다. 옅은 램프등의 빛을 받아 반짝이는 땀방울에 은하가 담겨있었다. 그것은 살에서 살으로, 그리고 이불자락으로 굴러 떨어진다. 켄마는 언젠가 물었던 것을 회상한다. '천주교는... 동성애를 죄악으로 보지 않나?' '뭐 그렇지. 집안 내력이야.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그때 켄마는 쿠로오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것은 마치 자신이 원해서 가는 것이 아니라는 뜻처럼 들렸다. '그러면 쿠로는 미사를 드릴 때 죄책감을 느끼지 않아?' '딱히.' '쿠로는 정말로 신이 있다고 믿어?' 켄마는 추궁하듯이 캐물었었다. 그리고는 돌연 입을 다물었다. 무례한 말이다. 쿠로오가 화를 낼지도 몰랐다. 그러나 쿠로오는 다만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푸스스 웃을 뿐이었다. 켄마가 재촉하자 겨우 입을 열었다. '글쎄...'
켄마는 쿠로오를 따라 성당에 간 적이 있었다. 쿠로오는 말렸지만 켄마가 고집을 부렸다. 새벽 미사에 가기 위해 켄마는 밤을 지새웠다. 쿠로오는 예배당 뒤에 위치한 대야에서 손가락에 물을 묻혀 가슴 위로 십자가를 그렸다. 켄마는 따라하지 않았다. 중간 열의 의자에 자리를 잡았다. 치렁치렁한 옷을 입은 남자가 기도를 올리고 면사포를 쓴 여자가 노래를 불렀다. 압도당할 정도로 엄숙하고 고요한 공간이었다. 옆에 앉은 쿠로오를 쳐다보고 있었지만 그는 켄마를 돌아보지 않았다. 오르간 파이프에서 나는 커다란 진동이 머리를 울렸다. 화려하고 기괴한 스테인글라스 너머로 동이 트는 것을 켄마는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을 사먹고 쿠로오와 헤어진 후 집으로 돌아온 켄마는 곧바로 곯아떨어졌다. 그 이후로 켄마는 성당에 가겠다고 하지 않았다.
9. 쿠로오는 밤을 걷는다.
쿠로오는 밤에 산책나가는 것을 즐겼다. 거처에서 도보로 20분 정도 떨어진 곳에 강변 산책로가 있었다. 조깅을 하는 사람들 사이로 스며들어서는 인적이 없는 어두운 곳으로 슬쩍 빠져나간다. 그곳은 무성하게 자란 수풀 사이의 마른 땅, 혹은 강과 바로 맞닿은 넙적한 바윗돌 위나 단순히 가로등이 꺼진 길 한가운데이기도 했다. 무엇을 하냐고 물으면 그는 별을 본다고 대답했다. '처음에는 별이 아니라, 그냥 멍때리고 있을 시간이 필요한 거였어. 그런데 이제는 이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아졌어.' 집 근처는 너무 밝기 때문에 달빛마저 희미하다며 쿠로오가 투덜댔다. 쿠로오는 자신의 '은신처' 중 하나로 켄마를 안내했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몇몇 별자리들을 켄마에게 가르쳤다. 켄마는 하루도 안되어 그것들을 잊어버렸다. 쿠로오는 켄마 앞에서 다소 수다스러운 경향이 있었으나 그럴 때, 하늘을 쳐다볼 때 만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내게 신이 정말로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지, 켄마."
그랬기에 쿠로오가 입을 열었을 때 켄마는 조금 놀랐다. 둘은 한적한 곳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켄마는 고개를 돌려 쿠로오를 쳐다봤다. 쿠로오는 여전히 위로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나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 저 우주 너머에 생명체가 있을 것이라고. 그 생명은 지구를, 그러니까 너와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야. 그 생명은 아주 오래 살았어. 아마도 우리의 지구가 생겨나기 전부터 대를 거듭했어. 우리가 보기에는 그 생명체가 너무 대단할거야.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마법들을 부리겠지. 그 생명체는 우리가 신이라고 부르고 숭배할만할 정도로 위대해... 하지만 그 생명체가 사는 행성에서는 또다시 그들이 숭배하는 신이 있을 것이고... 그런 식으로 반복되는 상상을 해."
"...소설 같아."
"그리고 그렇게 '지성과 신의 관계'가 거듭되다 보면, 그 끝에는 진짜배기 신이 있을까?"
"...무신론자는 모든 것이 원자와 분자로 이루어졌을 뿐이라고 믿어."
"그렇다면 켄마, 나는 무신론자일까?"
10.
"어렸을 때는 신이 있을거라고 생각했어. 신이 나를 굽어 살피고, 내 기도를 듣는다고 믿었어."
"어린아이는 누구나 그런 상상을 해."
"크다가 보니까... 잘 모르겠더라고. 신이 보살핀다고 보기에 세상은 너무 엉망이었어. 언제나 그런 식이었어. 신은 누군가의 사업을 도와주고, 누군가의 고민을 들어주었다지만, 나라를 정의롭게 만들어주지는 않았어."
"...쿠로."
"내가 게이가 되었을 때, 신은 나를 거부했어."
켄마가 눈치를 살피며 대꾸 없이 있자 쿠로오는 뒤늦게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쿠로오는 급히 덧붙였다.
"미안, 켄마. 너를 곤란하게 해버렸네. 나는 그냥... 잘 모르겠어."
"...신이 그랬듯이, 쿠로도 신을 버릴 수는 없는거야?"
"...잘 모르겠어, 켄마. 나는 성당에 가는걸 싫어하지는 않아. 나에게 잔잔함을 주거든. 그곳에는 많은 기억들이 담겨져 있어."
"나는 잘 모르지만, 추억 때문에 종교를 가지지는 않아, 보통은."
"글쎄, 어떨까..."
쿠로오는 켄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이제 잘 시간이야." 온기를 느끼며 켄마는 쿠로오의 품안에서 잠들었다. 쿠로오는 팔을 뻗어 램프의 등을 껐다.
11. 그는 꿈을 꾼다.
12. 그날, 켄마는 좋아한다고 말한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어느 새 사귄지 1년 조금 넘었다. 켄마는 말이 없었다. 쿠로오는 조심스레 켄마를 살폈다. 켄마는 무표정이었다. 다만 라멘 먹기를 멈췄을 뿐이었다.
"미안해, 켄마."
"미안할 거 없어."
둘은 언제나와 같은 모습으로 헤어졌다. 쿠로오가 켄마를 자취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유리문 너머로 켄마가 사라질 때까지 쿠로오는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후로 쿠로오는 일절 연락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켄마도 그렇게 했다. 아마도 휴학을 했을 것이었다. 더이상 도서관에서 쿠로오를 만날 수 없었고, 켄마는 쿠로오를 찾지 않았다. 쿠로오에게서 다시 메세지가 온 건 3개월 뒤였다. '그러니까, 정확히 98일.' 켄마는 생각한다. '일요일 오전 10시에 거기서 만나자.' 메세지의 내용은 간략했다. 켄마는 오랫동안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본다. 쿠로오는 일요일 오전에 켄마를 만나준 적이 없었다. 조금 후에 메세지가 하나 더 도착했다. '보고 싶어.' 소리 없는 감정에 켄마는 조금 울었고 오랫동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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