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날 백택은 문득 생각했다. '나보다 오래 산 것이 있을까?' 다음 순간 백택은 지구를 벗어났다. 칠흑 속을 신수는 유영해 나아갔다. 한참을 헤엄치다 입을 열어 소리쳤다. "거기요! 아무도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고요히 메아리쳤다. 백택은 덜컥 겁이 났다. 이곳을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뒤를 돌았다. 정신 없이 팔을 뻗어 출발했던 행성으로 스몄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랬군요."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은 다음 자물쇠로 걸어 잠가버렸어." 그리 말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카가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있었다. - "저도 가게 해주세요." 그의 음성이 웅웅 울렸다. 진동하는 그것이 수면을 찰박거리게 했다. 왜 그곳에 ..
;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물질 세계. --- 바닥에 깔린 투명한 돌들에게서 눈을 떼어 밖을 바라본다. 아, 지나간다. 어제는 포물선을 그렸는데, 오늘은 거의 직선에 가까운 궤도로 이동하고 있었다. 왜? 아하, 그것은 아마 그가 어제보다 가까운 곳을 지나가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부터 그의 거리, 그리고 아래위로 휘어짐의 정도가 연관이 있다는 걸까? 그것으로 공식을 유도해낼 수 있지 않을까? 남자는 시선을 고정했다. 왜인지 그것과 눈이 마주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인기척이 반갑다는 듯 꼬리를 하늘하늘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곧 고개를 돌렸다. 바깥 세계가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미물이, 하물며 자신의 눈길을 의식할리가. 한순간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눈꺼풀 없는, 컴퍼스로 그려낸..
;반응이나 기타의 현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계系에 가하는 에너지(자극)의 최소치. --- #1. 끈질긴 매달림이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밀쳐냈다. 그 손길은 결코 부드럽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그러나 오니는 쉬이 물러서지 않았다. 당신은 결국 내품에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하는 자부심이었는지. 그렇지 않다면 그저 막무가내로 이미 상처투성이인 몸을 몇 번이고 가시투성이 밭으로 들이박아오던 것인지. 꽤나 오랜 시간이었다. 자신은 그저 가늠할 수 밖에는 없지만, 아마도 수명을 가진 존재에게 있어-제 아무리 몇천년을 산다하여도-무시할 수 없는 세월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에게 손을 뻗어오는 오니를 백택은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는 좀 잠잠해졌을까, 이제는 그 마음이 조금은 바랬을까, 그..
--- "꿈틀거림." "...꿈틀거리는 것 말입니까. 태동이군요." "그렇지. 생명의 원초이자, 조건이지." 대화는 극락만월 안, 의자에 멍하니 앉아있던 백택이 돌연 말을 꺼내며 시작되었다. 종종 한 번씩 그랬다. 두서없이 생뚱맞은 말을 하는 그의 표정은 굉장히 많은 것을 품고있는 듯하기도 했고, 동시에 텅 비어보이기도 했다. 그럴 때면 그의 모든 것에서 세월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땅과 바다, 하늘이 생겨난 세계였고, 새카만 우주였으며 곧 시공간 그자체였다. 그럴 때마다 새삼 느끼는 것이었다. 호오즈키는 그러한 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내에서 최대한의 대답을 돌려주었다. 미지는 언제나 흥미롭다. 알고 싶고, 파헤치고 싶고, 가지고 싶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 그리고 ..
--- 천국에도 계절이 있나, 바보스럽게도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천계와 저승은 어찌되어도 행성에 위치해 있으니 인세와 같이 태양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를 반복한다. 따라서 날씨와 계절이 있어 마땅하다. 한편으로 하늘로 솟는다고, 또는 땅으로 꺼진다고 다다를 수 있는 곳도 아닌, 말하자면 다른 차원의 세계이므로 사사로운 물리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따지자면 다채로운 인세의 흉내를 내는 것일 뿐이다, 만약 그런 것이 정말로 있다면. 헛웃음이 나온다. 알고 있는데도. 언제보다도 세월의 흐름을 갈구하게 된다. 따스함과 추움, 비와 눈으로써 덮어버리고 싶어진다. 한 줄기 비가 떨어진다. 멍하니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본다. 톡, 하고 볼을 때리는 것을 가만히 둔다. 눈을 감는다. '연모하고 있습니다.' 메아리 울리듯..
---- 그만 두지 못하겠느냐. 오니는 우뚝 멈춰섰다. 말투가 아니라, 흐르는 기의 변화를 느낀 탓이다. 이미 너덧 번을 얻어맞아 엉망진창이 된 남자의 콧자락에서 붉은 것이 주륵 흘렀다. 백택은 성가시다는 듯 그것을 소매로 훔쳐 닦았다. 그것은 추호에도 고통이나 두려움의 표시가 아니었다. 그저 꼴에 자존심이 상하는 것에 얼굴을 구기는 것이다, 그렇게 보였다. 그러한 사실이 더욱 오니의 약을 올렸다. 처음의 그것은 한없이 한심스럽다는 의미의 야유였다. 그러나 그것은 차츰 증오로 바뀌어갔다. 오니는 입술을 깨물었다. 건방진 것. 이 내가 누구인 줄 알고. ...... 신기神氣였다. 그것이 둘 사이의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니의 한쪽 눈이 찌긋 일그러진다. 흔히 천적 관계라고들 하나, 그것이 한 쪽에게..
*극도의 이과 주의 *현대AU. 카가치와 백택. 과학자(생명공학자) 카가치. *어쩐지 '거의 모든 것의 역사'와 연관되는 이상한 느낌. 굳이 말하자면 번외. --- ...그렇습니까. ...믿어주는거야? 즉, 그 말은 즉 당신이 살아있는 화석이나 다름없다는 거지요? 뭐... 굳이 표현하자면. ...당신의 DNA를 채취하고 싶습니다. - 호오... 확실히. 놀라울 따름이군요. ...하하. 카가치는 병에 갇힌 혈액 표본을 이리저리 돌려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백택은 그저 떨떠름한 표정으로 부스스한 머리를 벅벅 긁을 뿐이었다. 남자의 강한 어필에 못이겨 마지못해 피를 뽑은 것은 어림잡아도 몇 달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대뜸, 자는 사람을 막무가내로 불러내어 왜인지 아무도 없는 음습한 실험실에 앉혀놓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