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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물AU
*세계관 날조(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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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하나 말해줄까?
...예?
사실 나는, 신수야.
그것이 어느 날이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백택과 호오즈키가 대면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하는 가신들이 늘더니, 둘은 어느샌가 마치 둘도 없는 친우인 양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그리 이야기하였다. 마치 물과 기름의 형세를 보는 듯하다고. 다른 이는 그리 생각하였다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두 공자가 함께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이라고. 원수와 친우, 두 사건의 정확한 계기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관계는 마치 강물이 흐르듯, 하늘에서 정해놓은 듯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이었다. 적어도 지켜보는 자들의 눈에는.
...신수라 하시면, 당신의 이름과 같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십니까?
그렇지. 백택, 그것이 나의 이름인 동시에 나의 존재 그자체야.
원체 백택은 장난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사칭할 정도의 대범함은 되지 못하였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호오즈키는 그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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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의 앞에 엎드려 복속을 맹세하는, 지금은 멸한 나라의 왕과 그의 어린 아들을 숨어 지켜보았던 것이 자신의 10살 즈음이었으니, 거의 20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었다. 옛 왕이었던 아비는 요절하였다. 그 영역은 현재 요僥의 군이 되었으며 그 나라의 왕족은 황제의 측근이 되어있다. 귀족에도 두가지 분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왕손 직계인 성聖이요, 다른 하나는 방계의 개념인 진眞이라 하였다. 황제의 차남이었던 백택은 진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게 된 이 외부인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 그 중 5살 아래의 꼬맹이를 몇 년 동안이나 괴롭혀온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고-혹은 그 반대로 보인다고-하여도. 그것은 어쩌면 그저 황궁에서 유일하게 놀 상대로 그나마 또래였던 호오즈키가 유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지금 되돌아본다면. 유일했던 형은 자신과 10살이나 터울이 나는 황태자였고, 삼남부터는 자신을 낳고는 죽어버린 황후를 대신한 첩의 자식이었으므로 어울리는 것이 순탄치 아니하였다.
왕위를 이어받을 존재의 그늘 안에서 사는 저는 황자로서의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즐겨왔다. 백택에게는 겸손할 필요도, 총명할 이유도, 정치에 능할 재능도 없었다. 백택이 여색에 빠져들게 된 것은 그가 15살일 때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들야들한 살로 이루어져있는 여자들은 두 손으로 한 웅큼씩 쥐어도 남는 것이 몽글몽글 새어나갔다. 그 만족스러우면서도 애타는 느낌이 자신의 삶을 짜릿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이 여자들이었고, 백택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아도 알아서 다가오는 수십, 수백의 그녀들을 모조리 안아들였다. 그것은 나른하고 몽롱한 행위의 연속이었다. 백택은 마약과도 같은 그것에 중독된 것만 같이 굴었다. 굳이 하나를 더 대라하면 그것은 왜에서 사로잡혀 왔다고 하는 진의 어린 공자였다. 조그맣고 나약하면서도 놀려대면 바락바락 달려드는 꼴이 제법 보기 즐거웠던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삶에서 반짝 빛나는 유흥이었다. 캄캄한 밤하늘 속 희미한 별빛이었다.
인정한 적은 없지만, 퍽 귀여운 소년이었던 호오즈키-백택은 그를 잡초라 불렀다-는 어느새 훌쩍 자라 제법 건장한 청년의 티를 풍겼다. 백택 또한이 그랬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 즈음 백택은 철이 들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두던 여자들부터 자신의 영역에서 조금씩 밀어내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호오즈키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였다. 본래 공부나 정치보다는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호오즈키는 그 능력과 성품을 인정 받아 장군으로서 자리를 잡았고, 그 새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일사천리로 어린 나이에 신임받는 황제 직속 호위 장군의 자리까지 올라있었다. 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존칭을 사용하였으나, 사적인 공간에서는 말을 누그러뜨리기 일쑤였다-라곤 해도 말투가 변하는 것은 거의 백택 뿐이었지만. 그들은 날씨, 사냥, 황궁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의 요즘 모양이나 주위국들의 형세, 정치의 이야기는 백택이 꺼려하니 꺼내지 않았고, 유흥이나 여자들의 이야기는 호오즈키가 흥미없어 하였기에 마지못해 넣어두었다. 심지어 그는 함께 왜에서 왔다고 하는 예쁘장한 여자 아이, 오코와도 별 접점이 없는 것으로 백택은 혀를 끌끌 찼다.
여자가 궁하지도 않을 터인데 어찌 할 이야기가 없는지에 대하여 불만과 궁금증을 가졌던 백택이 슬슬 남녀 관계를 유도하거나, 더 나아가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여자놀음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오즈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러던 중 단 한 번, 호오즈키가 백택의 명을 순순히 받든 적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괜한 핑계를 만들어 빠져나가거나, 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남을 중단해왔던 호오즈키였다. 평소 백택과 가깝게 지내던 귀여운 용모의 여자였다. 그녀가 그의 방에서 하룻밤 사이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백택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을 끝으로 호오즈키는 입을 딱 닫은 채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호오즈키가 안았던 그 여성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본가로 돌려보내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택은 공통된 관심사를 만드는 것을 그만 포기하였다.
주위의 눈에 성과 진이 서로를 가까이하는 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진은 역사적으로 탐욕스러운 무리였다. 간신諫臣들의 말을 백택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백택이 그들의 말에 넘어간 일이 있었으니, 백택이 호오즈키의 옛 나라와 그 조상들을 조롱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호오즈키의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한 방 먹였다며 환호하고 있던 황자의 얼굴을 냅다 후려갈긴 것이었다. 그 날로 호오즈키는 옥에 갖혔다가 며칠 후 백택의 부름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 날 밤, 백택의 방에서 호오즈키는 그를 탐하였다. 여성의 몸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던 백택은 호오즈키를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였다. 그러나 모진 날들을 보냈던 옥 생활의 유일한 보상이라는 양 허겁지겁 달라붙어오는 그를 백택은 떨쳐내지 못하였다. 그의 수감은 사실 백택의 의지가 아니었기에 못내 미안한 마음이 컸기도 하였고, 그 짧은 간 애속하게도 그가 그리웠던 탓이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주먹이 스쳤던 자리에 호오즈키는 집요하게 입을 맞추어대었다. 몸을 바르르 떨고 눈물을 터뜨리며 괴로워하는 백택을 그는 몇 번이나 어르고 달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것은 한바탕 정사를 끝내고, 둘 다 기진맥진하여 침상 위에 쓰러져있을 때의 말이었다. 아직 눈 주위가 부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꺼낸 말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호오즈키는 그저 '그렇습니까.'하고 나지막히 대답하였다. 장남도 아닌 차남의 이름을 굳이 신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에는 특별한 계시가 있었던 것이라고 언젠가 들었던 일을 상기해내며,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신수께서 인계에는 어쩐 일이시냐는 물음에 백택은 그저 농몽한 미소를 띠고는 글쎄, 하고 얼버무렸다. 그 말을 끝으로 백택은 눈을 감았고 호오즈키는 그런 그를 감싸안았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
'그 아이, 왜 집으로 가버렸는지 알겠네.'
'......'
'못살게 굴었지?'
'...당신을 안기 위한 연습이었을 뿐입니다.'
'음흉하긴.'
백택은 배시시 웃었다. 해는 중천에 떴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보고 누운 채였다. 이불에 반 쯤 가려진 그의 벗은 상체의 다부진 체격과 떡 벌어진 어깨가 탐스러웠다. 백택은 손을 뻗어 호오즈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매끈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밤, 자신을 적셨던 땀방울이 흘러내린 곳이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며 은연 중에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고.
"호오즈키."
"예."
"이제는 내 방으로 오지마."
그것은 일종의 선고였다. 네가 품었던 욕망으로써, 그것을 숨기지 못했던 너의 어리석음으로써, 너와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백택의 얼굴은 상냥했지만 냉소적이었다. 그것은 처음 만났을 적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길과 같은 것이었다. 호오즈키는 자신이 5살배기 꼬맹이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예.
-
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였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을 몇 년 전, 그 전 시기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공식적으로 몇 일에 한 번씩 문안 인사를 올리고, 황궁의 안에서 가끔 마주칠 때 이외에는 일절 접촉을 삼갔다. 본래 '친우'로서 성과 진의 접촉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제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한 때 온 중국을 호령하였던 황제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태자의 즉위식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무렵 호오즈키 또한 무언가의 준비로 밤낮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백택은 호기심을 띤 눈으로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백택이 처음부터 신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세를 세밀히 둘러보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빌려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잉태하는 방법을 택했던 신수는 어쩔 수 없이 갓난아기부터의 성장의 과정을 차례로 거쳐야 했고, 사고 또한 인간의 주어진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기에 낙강한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한 나라의 황자로 자랄 것이었다. 대신 신수는 하나의 계시를 걸어놓았는데, 인간으로서 성인이 되는 20세 무렵에 발현되도록 예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기가 차 백택은 꿈을 꾸었다. 소의 형상을 한 흰 동물이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꿈이었다.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그 동물의 눈부신 털이 휘날리더니 그 속에서 점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늘하늘 날리는 고급스러운 중국풍의 의복을 입고있던 그의 붉은 눈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온 짧은 음성이 백택을 일깨우는 신호가 되었다. 날이 밝고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적으로 거울을 쳐다본 백택은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서 본 신령한 인물과 자신의 얼굴이 똑 닮은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백택'. 그것은 자신의 이름인 동시에 신수의 이름이었다.
그 날 이후로 신수로서의 백택은 주인을 잃고 세상을 떠돌던 본래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안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 동안을 축적해 온 지식들이 홍수라도 난 양 퍼부어댔고, 자신은 가장 아래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 사실을 백택은 가장 먼저 호오즈키에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과시나 자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호오즈키가 특별한 인연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유일한 징표였다. 신수는 신으로서, 어느 한 생명만을 사랑하여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규칙과도 같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직 신수 자신만을 위한 규약이었다. 스러지는 것을 사랑하는 신수는 반드시 스러지게 마련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택은 호오즈키를 사랑하였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존재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호오즈키로써 백택은 인간과 신수의 기로에 서있었다. 온전한 신수로 존재하기 위해서 선을 넘어오는 그를 내쳤으나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백택은 혀를 찼다. 이러나 저러나 성가시기에 짝이 없는 것이었다.
최근에도 가끔씩 그를 마주할 때, 무표정을 가장한 그의 눈에 들어차 있는 무표정하지 않은 것을 백택은 또렷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호기를 만난 불길처럼 그 몸집을 불려가기만 했다. 저도 그것을 들키기 싫었는지 고의적으로 자신을 피해다니고 있었다.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런 호오즈키를 벌할 수도, 칭찬할 수도 없었다. 신수는 만사공평해야 하며, 세상의 흐름에 개입할 수 없다. 호오즈키는 인간인 백택을 사랑하였다. 이제는 호오즈키가 연모하던 것이 먼지처럼 사라져버렸으니, 신수는 그저 그런 그를 연민하였다.
황제가 훙서하였다. 온 세상이 슬퍼하며 통탄하였다. 한편으로 황태자의 즉위식은 온 백성의 축하와 환호로 성대하게 열렸다. 그곳에 호오즈키는 없었다. 이런 중대한 때일수록 바로 옆에서 차기 황제의 신변을 주시해야 할 장군이 어디로 갔는지 백택은 몰래 궁금해하였으나 우려와 달리 즉위식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신수 백택의 축복을 받아- 식을 관장하는 주자朱紫가 외치는 것을 그는 그저 듣고 있었다.
황태자가 관을 쓰기 직전, 장군은 무장한 정예병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꿈의 끝자락과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던가,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던가, 그런 것들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난亂이었다. 태자를 비롯한 수많은 가신들이 죽임을 당했다.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귀빈석에 얼떨떨하게 앉아있던 백택에게로 즉시 달려온 호오즈키가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반란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렇게 백택은 왕위에 앉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난장판 속에서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던 호오즈키를 떠올린다. 당신이 진정으로 신수라면, 이러한 자신을 죽임으로써 막아보라는 도발적인 의미를 담은 듯한 당돌한 눈빛이었다. 무덤까지 그 마음을 가져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이런 식으로 될 줄이야. '신은 세상의 흐름에 개입할 수 없다.' 백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 법이었다. 그의 한 줄기 불꽃과 같은 강렬한 염원이 그대로 전해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흘 후에 다시 열린 즉위식에서 백택은 신통한 능력을 내보이며 그 자신이 신수임을 공공연히 밝히었다. 그리고 일등 공신이었던 호오즈키를 지목하여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현세에 강림한 신수의 축복 속에서, 역사 최초로 반쪽짜리인 진이, 그것도 출신 모를 외지인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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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될 줄 예상하고 있었느냐, 백택은 그리 물으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와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나를 연모하였느냐. 호오즈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어렵사리 대답하였다. ...글쎄요.
호오즈키는 보름달이 밝았던 날을 되돌아보았다. 꼴에 술을 좋아하였던 황자가 한 손으로는 큼지막한 술병과 잔을, 다른 손으로는 자신을 이끌고 뜰 안의 정자로 향하였던 날이었다. 늦봄 무렵 지는 벚꽃이 투명한 호수를 치장하였고, 잔물결도 없이 거울 마냥 매끄러웠던 수면에 온 하늘의 빛들이 뛰어들어 있었다. 잔이 비기가 무섭게 다시금 채워주었건만 평소와 달리 그는 도저히 정도라는 것을 모르고 들이켜대었다. 졸지에 호오즈키는 초대받은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빈 술병을 다시 채워와야만 하였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과 달리 안색에 아무런 변화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신을 백택은 무엇이 아니꼬운지 그저 쏘아보았다. 그 모양은 잔을 입에 가져다 댈 때마다 더욱 사나워져갔다. 사실 호오즈키는 백택의 잔을 채우고 그의 묘하게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살피느라 정작 술은 거의 입에 대지 못하였던 터였다. 백택은 괜히 불퉁한 얼굴로 돌연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삿대질을 하며 외쳤더랬다. 계집 같은 용모하고는, 어찌 이리 사람을 성가시게 할꼬. 그 말에 덩달아 표정을 구기는 호오즈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미 정신을 반 쯤 놓은 그는 호숫가를 둘러보며 이번에는 그 아름다움에 푹 취한 듯 보였다. 거울에는 꽃이 드리웁고, 연못에는 달님이 비취는고나. 그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그대로 두면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버릴 것만 같아 호오즈키는 황급히 백택을 붙잡았다. 이제는 까마득한 지난 날, 그대로 곯아떨어진 백택을 들쳐매고는 툴툴대며 돌아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건대, 어쩌면 그때에 자신은 이미 취해있었는지도 몰랐다. 발갛게 달아오른 백택의 흰 얼굴, 밤하늘과 보색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꽃잎,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이 모두 부옇게 일렁였다. 얼굴 옆에서 느껴지는 술내를 품은 쌕쌕대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것은 마치 물결이 웅웅 이는 듯한 모습으로, 거센 파동이 되어 자신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글쎄요. 그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혹시 이 모든 게 한 자락 꿈은 아닐까.
...달이 연못에 비취듯이.
...뭐라고?
조금 후에야 백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호오즈키의 말을 알아들은 듯 가만가만 수긍하였다. 그렇지... 그래. 침상에 누운 백택의 목 언저리까지 단정하게 이불을 덮어주며 호오즈키는 붉은 문양이 떠오른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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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날조(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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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하나 말해줄까?
...예?
사실 나는, 신수야.
그것이 어느 날이었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백택과 호오즈키가 대면하는 모습을 보았노라 하는 가신들이 늘더니, 둘은 어느샌가 마치 둘도 없는 친우인 양 행동하고 있을 뿐이었다. 누군가는 그리 이야기하였다. 마치 물과 기름의 형세를 보는 듯하다고. 다른 이는 그리 생각하였다 한다. 하늘이 무너져도 두 공자가 함께 빠져나갈 구멍은 없을 것이라고. 원수와 친우, 두 사건의 정확한 계기를 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 관계는 마치 강물이 흐르듯, 하늘에서 정해놓은 듯 자연스러운 일련의 흐름이었다. 적어도 지켜보는 자들의 눈에는.
...신수라 하시면, 당신의 이름과 같은 그런 것들을 이야기하십니까?
그렇지. 백택, 그것이 나의 이름인 동시에 나의 존재 그자체야.
원체 백택은 장난을 좋아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한 나라가 섬기는 신의 이름을 사칭할 정도의 대범함은 되지 못하였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호오즈키는 그 말을 무겁게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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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는 늙어가고 있었다. 그의 앞에 엎드려 복속을 맹세하는, 지금은 멸한 나라의 왕과 그의 어린 아들을 숨어 지켜보았던 것이 자신의 10살 즈음이었으니, 거의 20년 전의 일이었던 것이었다. 옛 왕이었던 아비는 요절하였다. 그 영역은 현재 요僥의 군이 되었으며 그 나라의 왕족은 황제의 측근이 되어있다. 귀족에도 두가지 분류가 있었으니 하나는 왕손 직계인 성聖이요, 다른 하나는 방계의 개념인 진眞이라 하였다. 황제의 차남이었던 백택은 진의 끄트머리에 자리하게 된 이 외부인들을 심히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리 그 중 5살 아래의 꼬맹이를 몇 년 동안이나 괴롭혀온 것이었다. 물론 그것은 현재 진행형이기도 하였다. 비록 겉으로는 그리 보이지 않는다고-혹은 그 반대로 보인다고-하여도. 그것은 어쩌면 그저 황궁에서 유일하게 놀 상대로 그나마 또래였던 호오즈키가 유일하였기 때문이기도 하였다, 지금 되돌아본다면. 유일했던 형은 자신과 10살이나 터울이 나는 황태자였고, 삼남부터는 자신을 낳고는 죽어버린 황후를 대신한 첩의 자식이었으므로 어울리는 것이 순탄치 아니하였다.
왕위를 이어받을 존재의 그늘 안에서 사는 저는 황자로서의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즐겨왔다. 백택에게는 겸손할 필요도, 총명할 이유도, 정치에 능할 재능도 없었다. 백택이 여색에 빠져들게 된 것은 그가 15살일 때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야들야들한 살로 이루어져있는 여자들은 두 손으로 한 웅큼씩 쥐어도 남는 것이 몽글몽글 새어나갔다. 그 만족스러우면서도 애타는 느낌이 자신의 삶을 짜릿하게 만드는 유일한 것이었다. 손을 뻗으면 잡히는 것이 여자들이었고, 백택은 손가락 하나 까딱이지 않아도 알아서 다가오는 수십, 수백의 그녀들을 모조리 안아들였다. 그것은 나른하고 몽롱한 행위의 연속이었다. 백택은 마약과도 같은 그것에 중독된 것만 같이 굴었다. 굳이 하나를 더 대라하면 그것은 왜에서 사로잡혀 왔다고 하는 진의 어린 공자였다. 조그맣고 나약하면서도 놀려대면 바락바락 달려드는 꼴이 제법 보기 즐거웠던 것이다. 그것은 지루한 삶에서 반짝 빛나는 유흥이었다. 캄캄한 밤하늘 속 희미한 별빛이었다.
인정한 적은 없지만, 퍽 귀여운 소년이었던 호오즈키-백택은 그를 잡초라 불렀다-는 어느새 훌쩍 자라 제법 건장한 청년의 티를 풍겼다. 백택 또한이 그랬다. 굳이 표현하자면 그 즈음 백택은 철이 들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두던 여자들부터 자신의 영역에서 조금씩 밀어내었다. 그리고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호오즈키와 가깝게 지내기 시작하였다. 본래 공부나 정치보다는 무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던 호오즈키는 그 능력과 성품을 인정 받아 장군으로서 자리를 잡았고, 그 새 크고 작은 전투에서 공을 세워 일사천리로 어린 나이에 신임받는 황제 직속 호위 장군의 자리까지 올라있었다. 둘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존칭을 사용하였으나, 사적인 공간에서는 말을 누그러뜨리기 일쑤였다-라곤 해도 말투가 변하는 것은 거의 백택 뿐이었지만. 그들은 날씨, 사냥, 황궁의 일들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요의 요즘 모양이나 주위국들의 형세, 정치의 이야기는 백택이 꺼려하니 꺼내지 않았고, 유흥이나 여자들의 이야기는 호오즈키가 흥미없어 하였기에 마지못해 넣어두었다. 심지어 그는 함께 왜에서 왔다고 하는 예쁘장한 여자 아이, 오코와도 별 접점이 없는 것으로 백택은 혀를 끌끌 찼다.
여자가 궁하지도 않을 터인데 어찌 할 이야기가 없는지에 대하여 불만과 궁금증을 가졌던 백택이 슬슬 남녀 관계를 유도하거나, 더 나아가 그가 보는 바로 앞에서 여자놀음을 강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호오즈키는 눈 하나 깜박하지 아니하였다. 다만 그러던 중 단 한 번, 호오즈키가 백택의 명을 순순히 받든 적이 있었다. 평상시에는 괜한 핑계를 만들어 빠져나가거나, 여성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만남을 중단해왔던 호오즈키였다. 평소 백택과 가깝게 지내던 귀여운 용모의 여자였다. 그녀가 그의 방에서 하룻밤 사이 나오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고 백택은 뛸 듯이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 날 밤을 끝으로 호오즈키는 입을 딱 닫은 채로 원래의 상태로 돌아왔다. 나중에 알아보니 호오즈키가 안았던 그 여성은 병이 들었다는 이유로 본가로 돌려보내졌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백택은 공통된 관심사를 만드는 것을 그만 포기하였다.
주위의 눈에 성과 진이 서로를 가까이하는 것은 위태롭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진은 역사적으로 탐욕스러운 무리였다. 간신諫臣들의 말을 백택은 듣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백택이 그들의 말에 넘어간 일이 있었으니, 백택이 호오즈키의 옛 나라와 그 조상들을 조롱하였을 때의 일이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있던 호오즈키의 얼굴이 시뻘개지더니, 한 방 먹였다며 환호하고 있던 황자의 얼굴을 냅다 후려갈긴 것이었다. 그 날로 호오즈키는 옥에 갖혔다가 며칠 후 백택의 부름으로 풀려났다.
그리고 그 날 밤, 백택의 방에서 호오즈키는 그를 탐하였다. 여성의 몸에 익숙할 대로 익숙해져 있던 백택은 호오즈키를 받아들이기 힘겨워하였다. 그러나 모진 날들을 보냈던 옥 생활의 유일한 보상이라는 양 허겁지겁 달라붙어오는 그를 백택은 떨쳐내지 못하였다. 그의 수감은 사실 백택의 의지가 아니었기에 못내 미안한 마음이 컸기도 하였고, 그 짧은 간 애속하게도 그가 그리웠던 탓이다. 이제는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은, 자신의 주먹이 스쳤던 자리에 호오즈키는 집요하게 입을 맞추어대었다. 몸을 바르르 떨고 눈물을 터뜨리며 괴로워하는 백택을 그는 몇 번이나 어르고 달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것은 한바탕 정사를 끝내고, 둘 다 기진맥진하여 침상 위에 쓰러져있을 때의 말이었다. 아직 눈 주위가 부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서는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꺼낸 말이었다. 달리 할 말이 없었던 호오즈키는 그저 '그렇습니까.'하고 나지막히 대답하였다. 장남도 아닌 차남의 이름을 굳이 신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에는 특별한 계시가 있었던 것이라고 언젠가 들었던 일을 상기해내며, 어쩌면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였을 뿐이었다. 신수께서 인계에는 어쩐 일이시냐는 물음에 백택은 그저 농몽한 미소를 띠고는 글쎄, 하고 얼버무렸다. 그 말을 끝으로 백택은 눈을 감았고 호오즈키는 그런 그를 감싸안았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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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아이, 왜 집으로 가버렸는지 알겠네.'
'......'
'못살게 굴었지?'
'...당신을 안기 위한 연습이었을 뿐입니다.'
'음흉하긴.'
백택은 배시시 웃었다. 해는 중천에 떴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마주보고 누운 채였다. 이불에 반 쯤 가려진 그의 벗은 상체의 다부진 체격과 떡 벌어진 어깨가 탐스러웠다. 백택은 손을 뻗어 호오즈키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매끈한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지난 밤, 자신을 적셨던 땀방울이 흘러내린 곳이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며 은연 중에 생각하였던 것이다. 나를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고.
"호오즈키."
"예."
"이제는 내 방으로 오지마."
그것은 일종의 선고였다. 네가 품었던 욕망으로써, 그것을 숨기지 못했던 너의 어리석음으로써, 너와 나는 이제 돌아갈 수 없다고 하는. 백택의 얼굴은 상냥했지만 냉소적이었다. 그것은 처음 만났을 적 자신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길과 같은 것이었다. 호오즈키는 자신이 5살배기 꼬맹이로 되돌아간 것만 같다고 느꼈다. 그가 조용히 대답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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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로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였다. 둘의 사이가 가까워졌을 몇 년 전, 그 전 시기부터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공식적으로 몇 일에 한 번씩 문안 인사를 올리고, 황궁의 안에서 가끔 마주칠 때 이외에는 일절 접촉을 삼갔다. 본래 '친우'로서 성과 진의 접촉은 흔히 있는 일이 아니었으므로 오히려 그제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워진 듯한 모습이었다. 한 때 온 중국을 호령하였던 황제는 임종을 앞두고 있었고, 태자의 즉위식의 준비가 한창이었다. 그 무렵 호오즈키 또한 무언가의 준비로 밤낮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백택은 호기심을 띤 눈으로 그저 멀리서 지켜보고 있었다.
백택이 처음부터 신수였던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부터 본인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인세를 세밀히 둘러보기 위해 인간의 신체를 빌려 여자의 다리 사이에서 잉태하는 방법을 택했던 신수는 어쩔 수 없이 갓난아기부터의 성장의 과정을 차례로 거쳐야 했고, 사고 또한 인간의 주어진 범위 내에서만 가능했기에 낙강한 그는 아무 것도 모른 채 그저 한 나라의 황자로 자랄 것이었다. 대신 신수는 하나의 계시를 걸어놓았는데, 인간으로서 성인이 되는 20세 무렵에 발현되도록 예언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시기가 차 백택은 꿈을 꾸었다. 소의 형상을 한 흰 동물이 자신에게로 뛰어오는 꿈이었다. 순식간에 지척으로 다가온 그 동물의 눈부신 털이 휘날리더니 그 속에서 점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하늘하늘 날리는 고급스러운 중국풍의 의복을 입고있던 그의 붉은 눈꼬리가 야릇하게 휘었다. 그의 입이 열리고, 그 안에서 흘러나온 짧은 음성이 백택을 일깨우는 신호가 되었다. 날이 밝고 자리에서 일어나 습관적으로 거울을 쳐다본 백택은 얼어붙었다. 그도 그럴 것이, 꿈에서 본 신령한 인물과 자신의 얼굴이 똑 닮은 모양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중얼거렸다. '백택'. 그것은 자신의 이름인 동시에 신수의 이름이었다.
그 날 이후로 신수로서의 백택은 주인을 잃고 세상을 떠돌던 본래 자신의 모든 것들을 안아들이기 시작하였다. 차마 헤아릴 수조차 없는 시간 동안을 축적해 온 지식들이 홍수라도 난 양 퍼부어댔고, 자신은 가장 아래에서 그것들을 받아들였다. 그 사실을 백택은 가장 먼저 호오즈키에게 털어놓았다. 그것은 과시나 자만이 아니었다. 자신에게 호오즈키가 특별한 인연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유일한 징표였다. 신수는 신으로서, 어느 한 생명만을 사랑하여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암묵적인 규칙과도 같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오직 신수 자신만을 위한 규약이었다. 스러지는 것을 사랑하는 신수는 반드시 스러지게 마련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택은 호오즈키를 사랑하였다. 그것은 인간으로 태어나, 처음으로 자신을 사랑해준 존재가 그였기 때문이었다. 오직 호오즈키로써 백택은 인간과 신수의 기로에 서있었다. 온전한 신수로 존재하기 위해서 선을 넘어오는 그를 내쳤으나 그리움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백택은 혀를 찼다. 이러나 저러나 성가시기에 짝이 없는 것이었다.
최근에도 가끔씩 그를 마주할 때, 무표정을 가장한 그의 눈에 들어차 있는 무표정하지 않은 것을 백택은 또렷이 읽어낼 수 있었다. 그것은 하루하루가 지날수록 호기를 만난 불길처럼 그 몸집을 불려가기만 했다. 저도 그것을 들키기 싫었는지 고의적으로 자신을 피해다니고 있었다. 크게 의식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그는 그런 호오즈키를 벌할 수도, 칭찬할 수도 없었다. 신수는 만사공평해야 하며, 세상의 흐름에 개입할 수 없다. 호오즈키는 인간인 백택을 사랑하였다. 이제는 호오즈키가 연모하던 것이 먼지처럼 사라져버렸으니, 신수는 그저 그런 그를 연민하였다.
황제가 훙서하였다. 온 세상이 슬퍼하며 통탄하였다. 한편으로 황태자의 즉위식은 온 백성의 축하와 환호로 성대하게 열렸다. 그곳에 호오즈키는 없었다. 이런 중대한 때일수록 바로 옆에서 차기 황제의 신변을 주시해야 할 장군이 어디로 갔는지 백택은 몰래 궁금해하였으나 우려와 달리 즉위식은 순탄하게 진행되었다. 신수 백택의 축복을 받아- 식을 관장하는 주자朱紫가 외치는 것을 그는 그저 듣고 있었다.
황태자가 관을 쓰기 직전, 장군은 무장한 정예병들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것은 마치 꿈의 끝자락과 같은 일이었다.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던가, 온 세상이 붉게 물들었던가, 그런 것들은 잠에서 깨어남과 동시에 의식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난亂이었다. 태자를 비롯한 수많은 가신들이 죽임을 당했다. 아수라장의 중심에서, 귀빈석에 얼떨떨하게 앉아있던 백택에게로 즉시 달려온 호오즈키가 거칠게 팔을 잡아끌었다.
반란은 순식간에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황제의 자리가 비어있었다. 아무 것도 모른 채로 그렇게 백택은 왕위에 앉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난장판 속에서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던 호오즈키를 떠올린다. 당신이 진정으로 신수라면, 이러한 자신을 죽임으로써 막아보라는 도발적인 의미를 담은 듯한 당돌한 눈빛이었다. 무덤까지 그 마음을 가져가기를 요구하였는데, 이런 식으로 될 줄이야. '신은 세상의 흐름에 개입할 수 없다.' 백택은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을 돕는 자를 하늘이 돕는 법이었다. 그의 한 줄기 불꽃과 같은 강렬한 염원이 그대로 전해져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흘 후에 다시 열린 즉위식에서 백택은 신통한 능력을 내보이며 그 자신이 신수임을 공공연히 밝히었다. 그리고 일등 공신이었던 호오즈키를 지목하여 황제의 자리에 앉혔다. 그렇게 현세에 강림한 신수의 축복 속에서, 역사 최초로 반쪽짜리인 진이, 그것도 출신 모를 외지인이 왕위에 오르는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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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될 줄 예상하고 있었느냐, 백택은 그리 물으려다 그만 입을 다물었다. 이제와서는 의미가 없는 말이었다. 대신 그는 다른 말을 꺼냈다. 언제부터 나를 연모하였느냐. 호오즈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한참 후 그는 어렵사리 대답하였다. ...글쎄요.
호오즈키는 보름달이 밝았던 날을 되돌아보았다. 꼴에 술을 좋아하였던 황자가 한 손으로는 큼지막한 술병과 잔을, 다른 손으로는 자신을 이끌고 뜰 안의 정자로 향하였던 날이었다. 늦봄 무렵 지는 벚꽃이 투명한 호수를 치장하였고, 잔물결도 없이 거울 마냥 매끄러웠던 수면에 온 하늘의 빛들이 뛰어들어 있었다. 잔이 비기가 무섭게 다시금 채워주었건만 평소와 달리 그는 도저히 정도라는 것을 모르고 들이켜대었다. 졸지에 호오즈키는 초대받은 입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 빈 술병을 다시 채워와야만 하였다. 붉게 달아오른 그의 얼굴과 달리 안색에 아무런 변화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신을 백택은 무엇이 아니꼬운지 그저 쏘아보았다. 그 모양은 잔을 입에 가져다 댈 때마다 더욱 사나워져갔다. 사실 호오즈키는 백택의 잔을 채우고 그의 묘하게 신경질적인 분위기를 살피느라 정작 술은 거의 입에 대지 못하였던 터였다. 백택은 괜히 불퉁한 얼굴로 돌연 자리에서 비틀거리며 일어나더니 삿대질을 하며 외쳤더랬다. 계집 같은 용모하고는, 어찌 이리 사람을 성가시게 할꼬. 그 말에 덩달아 표정을 구기는 호오즈키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이미 정신을 반 쯤 놓은 그는 호숫가를 둘러보며 이번에는 그 아름다움에 푹 취한 듯 보였다. 거울에는 꽃이 드리웁고, 연못에는 달님이 비취는고나. 그가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그대로 두면 그 속으로 풍덩 빠져들어버릴 것만 같아 호오즈키는 황급히 백택을 붙잡았다. 이제는 까마득한 지난 날, 그대로 곯아떨어진 백택을 들쳐매고는 툴툴대며 돌아온 일이 있었던 것이다.
지금 돌아보건대, 어쩌면 그때에 자신은 이미 취해있었는지도 몰랐다. 발갛게 달아오른 백택의 흰 얼굴, 밤하늘과 보색을 이루며 흘러내리는 꽃잎, 하얗게 부서지는 달빛이 모두 부옇게 일렁였다. 얼굴 옆에서 느껴지는 술내를 품은 쌕쌕대는 숨결이 뜨거웠다. 그것은 마치 물결이 웅웅 이는 듯한 모습으로, 거센 파동이 되어 자신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글쎄요. 그는 다시 한 번 되뇌었다.
혹시 이 모든 게 한 자락 꿈은 아닐까.
...달이 연못에 비취듯이.
...뭐라고?
조금 후에야 백택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호오즈키의 말을 알아들은 듯 가만가만 수긍하였다. 그렇지... 그래. 침상에 누운 백택의 목 언저리까지 단정하게 이불을 덮어주며 호오즈키는 붉은 문양이 떠오른 그의 이마에 짧은 입맞춤을 하였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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