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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오즈키의 냉철/2차 창작

[귀백]COSMOS

동인지중독개체 2017. 3. 3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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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백택은 문득 생각했다. '나보다 오래 산 것이 있을까?' 다음 순간 백택은 지구를 벗어났다. 칠흑 속을 신수는 유영해 나아갔다. 한참을 헤엄치다 입을 열어 소리쳤다. "거기요! 아무도 없어요?" 없어요?... 없어요?... 고요히 메아리쳤다. 백택은 덜컥 겁이 났다. 이곳을 나가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둘러 뒤를 돌았다. 정신 없이 팔을 뻗어 출발했던 행성으로 스몄다.

"거기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랬군요."
"나는 그곳으로 들어가는 문을 닫은 다음 자물쇠로 걸어 잠가버렸어."

그리 말하는 그의 모습이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카가치는 그런 그의 이야기를 그저 듣고있었다.




-




 "저도 가게 해주세요."

그의 음성이 웅웅 울렸다. 진동하는 그것이 수면을 찰박거리게 했다. 왜 그곳에 가려고 하는 거야. 나는 싫어. 감은 눈속에서 동공이 요동쳤다. 손가락 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머릿속에 이리저리 전류가 튀었다.




-




"백택 씨!"

남자가 다급히 팔을 뻗어왔다. 백택은 뛰어드는 그를 얼떨결에 안아들여버렸다.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시간이 출렁, 일그러졌다. 넘어진 뒤쪽으로 바닥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바닥이 백택의 등 뒤로 끊임없이 꺼지고 있었다. 두 남자는, 백택은 휘어진 시공간 속으로 떨어지고 있었고, 그 모양은 수직의 통로를 이뤄갔다. 색색의 빛줄기들이 어지럽게 주위를 스쳤다. 소음. 동시에 귀가 먹먹할 정도의 적막. 카가치는 의식을 잃은 백택을 세차게 흔든다. 고함을 지른다. 거세게 요동치는 카가치의 모습은 중력에 어지럽게 일렁이는 빛 알갱이의 모습과 닮아있다. 점멸한다. 동시에 백택의 눈이 천천히 뜨였다. 그가 완전히 눈을 뜬 다음 순간, 우주의 불이 꺼졌다.




-




"눈, 떴네."

카가치는 눈을 찌푸렸다. 밝은 LED 등이 눈부셨다. 어둠에 잠겼던 시각세포가 다시 검은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었다. 목이 잠겨 쉰 목소리가 샜다. 여기는. 백택이 싱긋 웃었다. 창 밖으로 확인해봐. 무중력에서 카가치의 몸이 둥실 떴다. 그는 천천히 둥그런 창으로 다가갔다. 그는 한참 동안 그곳으로 들여다본다.

"...없어요, 아무것도."

백택 씨? 뒤돌아보자 신수는 그곳에 없다. 텅 빈 우주선 안을 카가치는 멍하게 쳐다본다. 똑똑. 놀라 다시 창으로 시선을 돌리자 백택의 얼굴이 밖으로 보였다. 카가치는 이제 체념했다는 얼굴이다. ...장난치지 마십쇼. 백택은 어느새 다시 선체의 안으로 들어와 있다. 여기가 어디냐는 본능적인 물음을 카가치는 눌러 삼켰다.

"좌표는요?"
"α 부근."
"광속으로 4년이네. 얼른 돌아가요."
"못 돌아가. 연료가 없어."
"장난치지 말고."

백택이 다시 웃었다. 그가 물었다. 돌아가고 싶느냐, 라고. 카가치는 그가 할 말을 알았다. '여기는 네가 꿈꾸던 곳이잖아.' 카가치는 잠시 망설였다.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없긴, 너와 내가 있잖아."

카가치는 말없이 백택을 지나쳐 조종실로 향했다. 좁고 어지러운 그곳은 조잡한 기계들의 집합소다. 최신식은 아니었다. 먼지 앉은 수많은 조작버튼 옆에 조그맣게 적힌 것은 빛바랜 러시아어다. 카가치는 고개를 들어, 통신 버튼으로 보이는 스위치를 켰다.

"미안, 작동 안 해."

곧 따라들어온 백택이 말했다.

"박물관에 있던 것들 중 하나를 가져온 거니까. 인간의 기계를 나는 잘 모르니까 말이야. 느낌만 낸 거야."
"......"
"설마 정말로 연료로 갈 생각은 아니었겠지?"

가다가 늙어 죽을걸. 그가 유쾌하게 말했다. 카가치는 한숨지었다. 지구까지 데려다주세요. 백택은 대답이 없다. 아니면 저를 깨워주세요. 말없이 다가온 백택이 카가치를 뒤에서 안았다. 고개를 돌려 쳐다본 그는 짐짓 슬픈 표정이다.

"왜? 카가치, 왜 돌아가려고 해?"
"......"
"네가 오고싶다고 했잖아. 그래서 너를 데려다준 거잖아."
"...그래도, 제가 원한 것은 이게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서 늙어 죽기 싫어요."
"그럼 조금만, 몇 년만 있다가 가, 응?"

혼자는 무섭단 말이야... 그가 중얼거렸다. 사랑해. 카가치, 사랑해. 카가치는 눈을 감았다.

"...알겠습니다. 함께 있을게요."

정말? 백택은 카가치를 힘껏 껴안아 그를 무너뜨렸다. 두 몸이 허공을 뒹굴었다. 시선이 교차했다.

"이곳과 당신이 질릴 때까지만."
"응, 알겠어. 사랑해, 카가치."




-




상대성. 유동적인 좌표계. 관찰자. 시간, 그리고... 중력. 고요한 어둠이었다. 광대한 공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속을 티끌 같은 인공물이 헤엄치고 있었다. 뒤로 물러서자 그것은 곧 시야에서 사라졌다. 왜냐하면 근접한 곳에 커다랗고 뜨거운 항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조차 곧 조그맣게 변하더니 사라졌다. 행성계, 여러 별들, 성단, 은하...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성긴 그물 구조를 이루던 빛은 점차 사라졌다. 사방이 컴컴한 곳을 온몸이 으스러질 정도로 튕겨나가고 있었다. 눈을 뜨기조차 힘들었다. 망가져가는 사고회로로 조그맣게 생각했다. 그 다음에는?

카가치는 눈을 번쩍 떴다. ...어땠어? 속살이는 목소리가 있었다. 카가치는 시라사와를 빤히 바라봤다.

"...당신."
"내가 정말이라고 했잖아."
"하지만 백택은... 그는 신이라구요."

카가치는 숨을 삼켰다. 눈 앞에 있는 인물. 어쩌다가 이 사람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더라. 잠에 빠진 건 어느 즈음? 생전 모르는 사람이었다. 시라사와는 정신병동에 있었고, 그의 간병인이 당한 교통사고의 목격자로서 부재를 알리러 온 것이었다. 그리고 카가치는 그날로 매주 시라사와를 찾게 되었다. 묘한 기분이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음 주에 또 올 거지?"
"...예에."

시라사와는 카가치를 배웅했다. 새하얀 남자, 새하얀 방. 시커먼 우주를 뒤로 하고 카가치는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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